김슬옹 선생님의 글.

1정 연수 등 초임 국어선생님들 연수 특강을 가면 아직도 훈민정음 공동 창제설(집현전 학사들과 함께)로 손드시는 분들이 많다. 왜 그런가 했더니 임용고시 시절 가장 많이 본다는 수험서ㅡ나찬연 교수님 아래 인용책 ㅡ가 그렇게 기술되어 있어서 그런 듯하다. 수험서일수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공동 창제설 또는 집현전 학사들 협찬설은 역사를 왜곡하는 주장들이다. 조선 사대부들은 한자 외 문자 창제는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찬연 교수님께서는 해례본 만들 때 집현전 학사들이 도와준 것을 오해하신 듯하다. 함께 창제했다고 하는 지헌전 학사들ㅡ정인지 최항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강희안 이개 이선로 ㅡ은 해례본 저술에서 세종을 도울뿐 실제로는 한글을 개인적으로 쓰지 않는다. 세종은 직접 공문서에 쓰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집현전 학사들이 같이 창제했다면 안 쓸 리가 없다. 하긴 18-19세기 정약용, 박제가, 박지원 같은 실학자들조차 한글사용을 거부하였으니(김슬옹(2017). ≪한글혁명≫. 살림터. 205-214쪽. 참조) 15세기 사대부들이 한글 안 쓴 것이 무슨 흠이 되겠는가?

* 친제설, 협찬설에 대한 자세한 역사적 배경과 설명은 “이상규(2018). ≪직서기언≫. 경진출판. 237-305쪽.”참조.

  • 나찬연(2012/2013: 2판). ≪훈민정음의 이해≫. 월인.
  • 나찬연(2013: 158) 역주: {계해년 동(癸亥年 冬)} 세종25년의 음력 12월이다.(양력으로 환산하면 1444년 1월이다.) 그동안 세종이 측근들과 함께 비공개적으로 창제하여 완성한 훈민정음의 글자와 사용법을 이때에 세상에 공개한 것을 이른다.
  • 나찬연(2013: 160) 역주: {최항(崔恒)}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서(1409~1474), 영의정을 지냈다.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으며 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경국대전, 經國大典≫,≪동국통감, 東國通鑑≫을 찬정(撰定)하였다.
  • 나찬연(2013: 160) 역주: {신숙주(申叔舟)}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1417~1475).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으며,≪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동국통감≫과 ≪오례의, 五禮儀≫를 편찬하였다
  • 나찬연(2013: 160) 역주: {성삼문(成三問)}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이다(1418~1456). 집현전 학사로 세종을 도와≪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세조 원년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저서에 ≪성근보집, 成謹甫集≫이 있다.
  • 나찬연(2013: 162) 역주: {정인지(鄭麟趾)}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서 대제학, 영의정을 지냈다.(1396∼1478) 대통력(大統曆)과 역법(曆法)을 개정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를 찬수하였다.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안지(安止), 최항(崔恒)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저서에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치평요람(治平要覽)≫ 따위가 있다.

[참조] 김슬옹(2019). ≪한글교양≫. 아카넷. 17-26쪽.(출판사 교정 직전 파일이라 원문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ㄱ. 과연 한글은 세종대왕이 혼자 만들었나?

1. 그런 위대한 문자를 혼자 만들었다고요?

한글, 곧 훈민정음을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가는 늘 뜨거운 관심사다. 핵심 증거 문헌인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세종이 직접 혼자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도 도무지 믿지 않고 그건 임금에 대한 ‘예우’일 뿐이라고 무시해버린다. 그럼 글쓴이도 잘라 말할 수밖에 없다. 양반 사대부들은 공동 창제자가 될 수 없다고. 조선 시대 양반 사대부들은 한자 이외의 문자를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들은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일을 저어했다. 그럼 18~19세기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조차 한글 사용을 거부했다고 하면 그때서야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세종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은 세종을 영웅화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저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세종은 10년 이상을 우리말에 안 맞는 한자, 한문에 대해 고민하다가 새 문자 28자를 만들어 1443년 12월에 공표했다. 당연히 새 문자의 가치와 세종의 새 문자 정책에 동조했던 집현전 학사들이 새 문자 해설서 집필과 반포를 도왔다. 이 때문에 공동창제설 또는 협찬설이 생긴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때 도와준 집현전 학사들은 개인적으로 한글을 쓰지 않았다. 공동 창제자라면 안 쓸 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세종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그러한 맥락 속에 역사적 진실과 한글 창제의 역사적 당위성과 필연성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당위성에 담겨 있는 역사적 가치는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2. 세종 단독 친제의 증거들

세종대왕이 혼자 한글을 창제했다는 증거나 근거를 1차 자료와 2차 자료로 나눠 살펴보자. 가장 강력한 1차 증거는 세종대왕이 직접 저술한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나와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_세종 정음 서문

이렇듯 세종이 직접 “내가 - 만드니”라고 밝히고 있다. 창제 동기와 목표를 기술하면서 한글 창제 주체를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공동 창제설로 하려면 이 말이 거짓임을 입증해야 한다. 아니면 이건 창제 주체자가 직접 쓴 것이니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하면 한글 창제 사실을 최초로 알린, 당시 기록을 생생하게 남긴 사관들의 세종실록 기록을 보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_온라인 ≪세종실록≫ 세종 28년(1443년) 12월 30일

“친히 지었다는” 뜻의 ‘친제(親制)’에서의 ‘친’은 임금임에도 직접, 손수 만들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임금이 누군가에게 명하여 만든 게 아니라는 의미기도 하다. 이 기록의 진정성은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당대 최고의 관리이자 학자인 정인지의 입을 빌어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친히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것을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_≪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서

역시 세종(우리 전하)이 창제했다고 밝히고 있다. ‘상친제(上親制)’에서 ‘상(임금)’이 ‘아전하(我殿下)’로 바뀌고 ‘제(制)’는 ‘창제(創制)’로 바뀌었다. 일부에서 ‘제(制)’자는 ‘제(製)’와 다르게 순수한 창제가 아니라고 하는 이들도 있으나 ‘制’는 언해본에서도 ‘만들다’로 해석했고, 정인지의 서문에 ‘창(創)-’이 붙었으므로 그러한 이의제기는 성립하기 어렵다. ‘창제’는 15세기나 지금이나 새로운 발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정인지서는 창조 주체자인 세종과 여덟 명의 학사들과 해례본 저술 동기와 맥락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드디어 전하께서 저희들로 하여금 상세한 풀이를 더하여 모든 사람을 깨우치도록 명령하시었다. 이에, 신이 집현전 응교 최항과 부교리 박팽년과 신숙주와 수찬 성삼문과 돈녕부 주부 강희안과 행 집현전 부수찬 이개와 이선로들로 더불어 삼가 여러 가지 풀이와 보기를 지어 그 대강을 서술하였다. _≪훈민정음≫해례본 정인지서

“상가해석(詳加解釋), 여덟 명은 세종 명으로 풀이를 더했다는 것이다. 세종이 만들어놓은 1차 자료를 바탕으로 그것을 자세히 풀어낸 것뿐이지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해설을 쓰지 않았음을 밝힌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창제 주체자인 세종의 그 대단한 새 문자 창제 공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신 업적이 모든 왕들을 뛰어넘으셨다. _≪훈민정음≫해례본 정인지서

“하늘이 내린 성인”이란 표현은 황제급에나 쓰는 표현인데 중국에 대한 사대를 생명처럼 여기는 이들이 이런 헌사를 바친 것이다. 이렇게 ≪훈민정음≫ 서문에서 창제자가 직접 서술한 내용의 진정성과 역사성을 관련 기록에서 두루 증언하고 있는데도 믿지 않는다면 또 어떤 증거가 필요한가. 그렇다면 이는 어떤가?

신 등이 엎디어 보건대, 언문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임금께서) 새 문자를 창조하시는데 지혜를 발휘하신 것은 전에 없이 뛰어난 것입니다. _ 온라인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년) 2월 20일

훈민정음 창제 후 반포를 반대했던 최만리 등 7인의 갑자상소에서조차 세종 친제를 증언하고 있다. 언문, 곧 훈민정음의 놀라운 기능과 우수성을 언급한 뒤 처음 발명을 뜻하는 ‘창물(創勿)’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형출천고(夐出千古)” 이는 아득히 먼 옛날, 단군 시대 그 이상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을 세종이 해냈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2차 문헌의 기록을 보자. 같은 시기의 증언과 문헌 기록에서도 세종 친제임을 밝히고 있다. 먼저 ≪동국정운≫ 서문에서 신숙주의 증언을 보자.

신들이 재주와 학식이 얕고 짧으며 학문 공부가 좁고 비루하매, 뜻을 받들기에 부족하니 매번 지시하심과 돌보심을 번거로이 하게 되겠기에, 이에 옛사람이 편성한 음운과 제정한 자모를 가지고 합쳐야 할 것은 합치고 나눠야 할 것은 나누되, 하나의 합침과 하나의 나눔이나 한 성음과 한 자운마다 모두 주상 전하의 결재를 받고, 또한 각각 고증을 하여, 이에 사성으로 조절하여 91 운과 23 자모(첫소리)를 정하여가지고, 임금께서 친히 지으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였다. _≪동국정운≫ 서문

신숙주는 해례본 저술에 깊숙이 관여한 학자다. ≪동국정운≫은 동국 곧 조선의 기준으로 조선에서 만든 훈민정음 체계로 한자음을 나누고 기록한 책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작성 1년 뒤인 세종 29년 1447년에 완성하고 세종 30년인 1448년에 전국에 있는 각종 교육기관에 보급한 책이다. ≪동국정운≫ 자체도 세종의 기획과 세심한 참여로 이루어졌으며, ≪동국정운≫에 쓰인 한자음 표기 문자인 훈민정음을 세종이 친히 지은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역시 신숙주가 대표 집필한 ≪홍무정운 역훈≫ 서문에서 신숙주의 증언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세종대왕께서 운학(성운학)에 뜻을 두고 끝까지 연구하여 훈민정음 몇 글자를 창제하셨다. _≪홍무정운 역훈≫ 서문

≪홍무정운≫은 명나라 황제가 펴낸 중국 운서이고 여기에 나오는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적은 책이 ≪홍무정운 역훈≫이다. 발음과 문자 연구에 꼭 필요한 성운학을 연구한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이다. 신숙주와 더불어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 참여하고 해례본 간행 1년 전에는 요동반도에 와 있던 황찬이라는 중국 음운학자를 만나기도 했던 성삼문이 대표 집필한 ≪직해동자습≫ 서문에서 성삼문의 증언도 확인된다.

우리 세종과 문종께서 이를 딱하게 여기시어 이미 훈민정음을 만드시니, 천하의 모든 소리가 비로소 다 기록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 _≪직해동자습≫ 서문

여기서는 세종과 문종이 함께 만들었다고 하지만 문종이 왕세자로서 측근에서 보좌했다는 의미로 여기면 된다. 최소한 해례본에 참여한 8학사와 더불어 창제하지 않았다는 반증도 된다.

물론 세종대왕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했다고는 해도 집현전과 같은 훌륭한 연구소와 수많은 인재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글은 언어학과 음악, 천문학 등 여러 학문을 두루 잘 아는 사람이, 더욱이 사람 간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오래 연구해야 만들 수 있는 문자이지 여럿이 함께 만들 수 있는 문자가 아니다. 다만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세종대왕의 연구를 간접으로 도왔기에 단독 창제가 가능했다.

3. 맺음말: 임금만이 가능한 비밀 프로젝트

세종이 단독으로 한글을 창제했다는 얘기는 결국 1443년 12월 최초 공표할 때까지 비밀 프로젝트로 진행했다는 얘기기도 하다. 이는 비밀리에 추진했다는 증거와 왜 그랬는지를 밝히면 된다.

첫째, 1443년 12월에 창제 사실을 밝힐 때까지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임진왜란 때 불탄 1차 기록인 승정원일기에는 남아 있었을 수도 있겠으나 실록 자체만 본다면 기록이 전혀 없다. 문자가 어느 날 갑자기 발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오랜 세월 연구를 진행했으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한 건도 없다. 1443년 12월에 28자를 창제했다고 실록에 간단하게 실려 있지만 그 28자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세월이 필요했을지는 뻔하다. 1444년 2월 16일에 중국 운서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적으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새 문자에 자신감이 넘쳤고, 그만큼 확실한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며, 중국 운서와 관련해서 세심한 연구가 이미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 공개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협찬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세종의 단독 아이디어만큼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아이디어를 공개하고 거기에 동참할 사대부 연구 집단을 마련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대감들 우리 한번 한자와 다른, 한자보다 더 뛰어난 새 문자를 만들어봅시다”라는 제안이나 명령이 통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런 논의 자체가 불가능했다. 1443년 12월 이후 일부 사대부들이 동조한 것은 이미 문자 창제가 끝났고 그 뛰어난 기능에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운서는 사대부들의 필수 도구였다. 운서의 한자음은 중국의 뜻글자로는 제대로 적는 것조차 불가능해서 배우기 힘들었다. 그런 운서의 한자음을 마음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가 나왔으니 어찌 설득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새 문자에 대한 실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공개나 공동 연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례본 저술에 참여한 8인조차 실제 개인 문자 생활이나 공적 문자 사용에 훈민정음을 적용하지 않았다. 18~19세기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조차 한글 사용을 거부했을 정도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만중, 정철, 이황 등 극히 일부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한자 외 문자는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것이 조선의 현실이었다.

셋째, 세종만이 창제 주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간접 증거는 꽤 여러 가지가 있다. 세종의 오랜 교화와 소통의 꿈이 반영된 것이 훈민정음인데 그와 관련된 기록이 창제 17년 전인 1426년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바로 한자, 한문 사용의 어려움, 소통과 교화의 어려움에 대한 토론이다. 이 점은 2장에서 상세하게 기술하겠다.

넷째, 새 문자 창제는 고도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한 작업이다. 만일 공개 프로젝트로 진행했다면 끊임없이 반대 상소에 시달려야 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집중적인 연구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것은 세종은 창제자의 조건인 통합성과 창의성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세종은 뛰어난 언어학자요, 과학자요, 예술가였다. 한글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정통한 학자의 통섭 접근이 있어야만 창제가 가능한 문자다.

여섯째, 한글 자체에 담겨 있는 놀라운 사상과 그러한 사상의 소유자가 바로 세종이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보편적 음성과학과 보편적 철학(음양오행+천지인 삼조화 사상)의 철저한 결합이다. 훈민정음의 배경 이론은 천문과 음악 연구를 바탕으로 구축한 언어 이론이다. 오늘날의 랑그(langue) 중심의 근대 언어학과 파롤(parole) 중심의 탈근대 언어학 원리를 반영하였다.

세종이 한글을 단독으로 창제했다고 해서 임금으로서 누렸을 각종 역사적 혜택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아니었고 임금으로서의 권력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창제도 반포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정리해보자.

“역사는 세종을 만들었지만 세종은 역사를 새롭게 썼다.”

협찬설의 가장 큰 뿌리는 그런 위대한 문자를 세종 혼자 만들었을 리 없다는 일반상식적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혼자 만들 수는 없다. 세종은 임금으로서 국가 제도와 다양한 인재들을 간접적으로 활용했을 것이다. 다만 핵심 아이디어와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던 의지는 세종 단독의 것이고, 임금으로서 가족(왕자 등)과 수많은 신하에게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친제설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