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운의 축약

문제 제기

'ㅣ'와 '어'가 만나 'ㅕ'가 되는 것, 'ㅗ/ㅜ'와 'ㅏ/ㅓ'가 만나 'ㅘ/ㅝ'가 되는 것을 지금까지 '모음 축약'으로 가르쳐 왔는데, EBS와 수능에서 이것을 'j 반모음화', 'w 반모음화'로 출제(해설)하고 있다.
'기어>겨', '쏘아>쏴'는 축약인가, 대치인가?

축약

  • 만약 이것을 대치로 가르친다면 국어의 이중모음은 모두 음소의 수가 2개가 되어야 한다.
  • 그리고 이중모음은 단일 음소가 아니라 반모음(반자음)+단모음으로 나누어서 설명해야 하는데, 교과서의 체계를 보면 '음운 변동' 앞에 '음운 체계'가 나올 때 국어의 음운 체계에서는 '반모음'과 '반자음'을 전혀 다루지 않다가 '음운 변동'에서 갑자기 '반모음'의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 물론 '피어>피여'를 '반모음 첨가'로 설명하므로 '반모음'의 존재를 학생들에게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는 일이긴 하다.

대치

  • 사실 학문 문법에서는 이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원래부터 '기어>겨'는 'ㅣ반모음화'였다.
  • 현재, 거의 대부분 국어 교사들의 인식 속에서 'ㄱ+ㅎ>ㅋ'이 자음 축약이고 'ㅣ+ㅏ>ㅑ'가 모음 축약이다.
  • '대치, 첨가, 탈락, 축약'의 관점에서 보면 'ㄱ+ㅎ>ㅋ'도 축약이고 'ㅣ+ㅏ>ㅑ'도 축약은 축약이다. 그런데 원래 'ㅣ+ㅏ>ㅑ'는 모음 축약이 아니고 '음절 축약'이었다. 그걸 엄밀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자음 축약/모음 축약'으로 생각해 오던 현장의 잘못이 크다.
  • 추측컨대, 마지막 국정 문법 교과서의 바탕이 된 1985년 <표준국어문법론>을 쓴 남기심, 고영근 선생의 전공이 '음운론'이 아니어서 그동안 '학교 문법'의 음운론 분야에서 정밀한 기술이 부족했던 것이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 이번에 이진호 선생이 힘을 내어 그간의 문제들을 바로 잡으려 하는 것이 교육 현장의 문법 교사들의 기존 인식과 충돌하게 된 것 같다.

관전 포인트

  1. '자음접변'이라는 문법 용어가 있었다. 자음이 '접'하면 '변'한다는 뜻이다. '국물>궁물', '신라>실라' 같은 것들. 그러다가 자음의 발음 위치나 방법이 '같아진다'는 점에서 '변화'보다는 '동화'가 더 정확하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자음접변'은 사라지고 '자음동화'가 되었다.
    1. 그런데 '자음동화'에도 방법동화, 위치동화, 순행동화, 역행동화, 상호동화, 완전동화, 불완전동화 등 다양한 현상이 섞여 있기 때문에 더 정확한 용어가 필요해졌다.
    2. 결국 자음동화는 현재 비음화 '국물>궁물'과 유음화 '신라>실라'로 나누어졌다.
    3. 앞으로는 비음화도 비음동화 '국물>궁물'과 비음화 '종로>종노'로 세분화될 것이다.
    4. 또한 유음화도 유음동화 '신라>실라'와 유음화 '목단>모란', '한아버지>할아버지', '곤난>곤란', '존나>졸라'로 세분화될 것이다.(다만, '유음화'는 불규칙하므로 교과서에 실리지는 않을 듯)
    5. '-화'와 '-동화'를 구분하는 것은 'ㅣ모음 역행동화'에서도 중요한 포인트이다. '고기>괴기', '난장이>난쟁이'는 분명 후행음절의 '기/이'에 동화된 'ㅣ모음 역행동화'이다. 그러나 '소주>쐬주'에서 'ㅗ>ㅚ'는 동화주가 없으므로 단순히 '전설모음화'가 된다.
  2. '말음법칙'이라는 문법 용어가 있었다. '말음'에 오는 음소의 변동에 대한 법칙이다. '말음'이 음절말인지 단어말인지 불분명해서 '음절의 끝소리 규칙'으로 바뀌었다.
    1. 그런데 음절의 끝소리 규칙에는 대치(대표음되기=평파열음화)와 탈락(자음군단순화=겹받침탈락)이라는 다른 현상이 섞여 있어서 더 정확한 용어가 필요해졌다.
    2. 결국 음절의 끝소리 규칙은 현재 '음절말평파열음화'와 '자음군단순화'으로 정착되고 있다.
    3. '음절말평파열음화'를 '내파음화/불파음화'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건 음소 단위가 아닌 '음성' 단위의 표현이므로 적절하지 않다. '평파열음'이 어려우므로 중학생들에게는 '대표음되기' 정도로 가르치는 게 어떨지.
    4. '자음군단순화'는 초성에서의 탈락인지 종성에서의 탈락인지 구별이 안 되므로 '겹받침탈락'이 더 맞는 표현인 듯하다.
  3. 음운의 축약 중에서 '모음 축약' 부분이 바로 지금 이러한 변환기를 맞이한 것 같다. 현행 교육과정의 주류 입장은 '반모음'을 '반자음'으로 보며, '이중모음'은 두 개의 음운으로 본다. 그래서 '기어>기여'는 '대치(이중모음화)'가 아닌 '첨가(ㅣ반모음첨가)'로 , '주어>줘'는 '축약(모음 축약)'이 아닌 '대치(ㅜ반모음화)'로 본다. 문제 제기에서 언급한 EBS도 이러한 입장을 반영한 듯하다.

모음 축약은 없는가

  • '아이>애', '사이>새', '금시에>금세' 이것들은 모음 축약인가? 아니면, '음운의 변동'이 아니라 '형태의 변형'인가? 통시적으로야 'ㅣ반모음화' 후에 단모음화되었겠지만 공시적으로 설명 가능할까?
  • 아이들 입말에서 '용돈 줘'를 '용돈 조(죠)'라고 표현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모음 축약으로 보인다. 대학에서 조별과제를 할 때, 조 이름을 '예쁘조'로 짓는 건 '단모음화(=반모음탈락)이고 '밥 조'로 짓는 건 모음 축약. 'ㅜ'의 원순성에 끌려 'ㅓ'가 같은 높이/위치의 원순모음이 되는 것.. (무한도전 '혛용돈죵' 참고)
  • '되어>돼', '뵈어>봬' 이것들은 모음 축약인가? '되어>뒈어>뒈=돼'의 과정을 겪는 'ㅓ탈락'에 가깝지 않을까? '서어서>서서', '가아서>가서'와 같은.
  • '뜨이다>띄다', '쓰이다>씌다'는 축약인가? 일단 '뜨이다>띄다'에서 'ㅢ'를 상향 이중모음으로 보면 'ㅡ반모음화'가 될 것이고, 'ㅢ'를 하향 이중모음으로 보면 'ㅣ반모음화'가 될 것인데, 실제 발음은 '띄다>띠다', '씌다>씨다'가 되므로 '반모음 탈락'이 이어지는 현상이 된다.
  • '쉬었다>쉈다', '사귀었다>사궜다', '바뀌었다>바꿨다'는 어떤가(바뀐 뒤의 ㅓ는 ㅕ를 표시함)? '사귀어>사궈'를 보자. [ㅅㅏㄱㅜㅣㅓㅆㄷㅏ] > [ㅅㅏㄱwjㅓㄷㄸㅏ] 에서 wj 연쇄가 발음은 되는데 표기는 안 된다(반모음=반자음이므로 초성에 '자음연쇄'가 올 수 없다는 점에서 발음도 안 되는 건 아닌지?). 훈민정음에서는 표기할 수 있게 만들어두었는데 현대 국어표기법이 너무 엄격해서 '한글'의 무한한 가능성/잠재력을 억압하는 것 같다.
  • 하지만 이건 기본적으로 '단모음'인 'ㅟ'를 다른 이중모음들과 같이 표기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ㅟ'의 음가에 해당하는 단일한 모음기호가 개발되면 '사귀었다'의 준말표기도 쉬워질 것이다.
  • 'ㅣ+ㅏ>야', 'ㅣ+ㅗ>요'와 같이 'ㅣ+ㅡ>A' 도 발음은 되는데 표기가 안 된다. 주시경 선생은 'ㅣ+ㅡ>A'에서 A가 바로 훈민정음의 아래아(·)의 진짜 발음이라고 논증한 적이 있다.

자음 축약은 '축약'인가

  • 'ㄱ+ㅎ/ㅎ+ㄱ>ㅋ' 이것은 자음 축약이다.
  • 'ㄱ+ㅂ>ㄱㅃ, ㅂ+ㄱ>ㅂㄲ' 이것은 대치(된소리되기)이다.
  • 'ㄱ+ㅎ/ㅎ+ㄱ'을 대치(경음화)+탈락(ㅎ탈락)으로 설명할 수 없을까? 만약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국어의 음운 변동에서 '축약'이라는 범주에는 '음절 축약'만 남을 것이고, 현재처럼 '자음 축약(O)/모음 축약(X)/음절 축약(언급 안 함)'과 같은 이상한 대립은 사라질 것이다.

결론

  • 'ㅣ'와 '어'가 만나 'ㅕ'가 되는 것, 'ㅗ/ㅜ'와 'ㅏ/ㅓ'가 만나 'ㅘ/ㅝ'가 되는 것은 앞으로 'j 반모음화', 'w 반모음화'로 가르칠 수밖에 없다.
  • 다만, 교과서에서 '음운 체계' 단원을 가르칠 때 반드시 '반모음/반자음'의 존재를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다른 관점

  • 대치, 탈락, 축약, 첨가는 음운 변동의 결과를 중심으로 분류한 것이다.
  • 음운 변동의 원인을 중심으로 분류하는 관점에서는 이것이 '대치'냐 '축약'이냐는 전혀 의미 없는 싸움이 된다.
  • '의미명료화 vs 발음편의'로 설명
  1. 모음충돌회피라는 단일 설명으로 본다면, 아래의 '축약, 탈락, 대치, 첨가'가 모두 '모음 충돌 회피'라는 같은 현상이다.
    1. 아이>ㅏㅣ>애 : 음운 축약(각종 방언에서는 '아이[아:]'처럼 'ㅣ' 탈락과 보상적 장모음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2. 쓰어>ㅡㅓ>써 : 음운 탈락
    3. 보아>ㅗㅏ>봐 : 음운 대치(오이>외 따위)
    4. 지이산>ㅣㅣ>지리산 : 음운 첨가(폐염>폐렴 따위)
  2. 다만, '모음 충돌 회피'로만 설명하면, 음운 변동의 출력형을 예측할 수가 없다는 큰 약점이 있다. 그래서 '대치, 탈락, 축약, 첨가'가 학교 문법에서는 의미 있는 범주로 사용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