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털도사의 시 쓰기 지도

함께 여는 국어교육 2009년 7월 ~ 2010년 4월 연재

충북 회인중학교 정진명 goaud@chol.com

시 쓰기를 위한 준비

시의 특성은 논리가 아닌 감성

시를 가르친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시 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 어려움은, 시가 글로 쓰이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글의 본래 기능인 의미가 아니라 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딴 것’이란 느낌을 말합니다. 감성, 감수성이 그것이죠. 감수성은 사물이나 상황을 보고 느낀 것을 말합니다. 느낌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그것을, 뜻을 전하는 도구인 글로 드러내려고 하는, 처음부터 불가능할 것 같은 짓을 하자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시가 아니고, 시 쓰기를 가르치자면 이 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을 확 바꾼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기도 합니다. 시를 써보지 않은 사람은 시를 논리로 바라봅니다. 논리로 잘 분석되고, 설명하기 편한 시를 좋은 시라고 결정짓는 경우가 허다하죠. 그렇게 쉬우면 누가 시 쓰기를 걱정할까요? 그러나 실상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늘 말썽인 것입니다.

따라서 시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사람은 논리와 설명을 통해서 접근해도 되지만 쓰기를 가르치려면 논리나 설명 가지고는 전혀 접근이 안 됩니다. 시는 논리를 넘어서는 감성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감성은 논리에 바탕을 두지만 논리를 늘 넘어섭니다.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자습서에서 분명하게 밝혀준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주제는 머리만 좋으면 금방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에서 전하는 것은 주제가 아닙니다. 그 주제 주변에 서려있는 정서, 즉 느낌입니다. 그 느낌은 말로 형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설명해도 비슷하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을 분명하게 볼 줄 알아야 시 쓰기를 지도할 수 있습니다. 좋은 시와 잘 쓴 시는 여기서 갈라집니다. 주제에서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감성에서 갈라집니다. 따라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성이 자꾸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 좋은 시이지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서 깨달음이 오는 시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제가 부각될수록 감성이 줄어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음 두 시를 비교하면 이 말들이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교과서에는 두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와 김종길의 「성탄제」가 그것이죠.

이 두 작품을 놓고서 선생님들한테 어느 작품이 더 좋은 거냐고 물으면 열에 일고여덟은 김종길의 작품을 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의 세례를 받은 결과라고 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시의 본질에 비추어보면 황동규의 작품이 훨씬 더 나은 작품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달되는 느낌의 진폭이 「성탄제」보다 「즐거운 편지」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성탄제」가 더 좋다고 판단하는 것은 비평의 논리에 아주 잘 맞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논리로 설명하기 아주 좋은 작품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잘 썼다는 뜻입니다.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의 「성탄제」 전문.

이 시는 발상법도 전개 수법도 아주 선명합니다. 나이 서른이 된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할 때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절박했던 한 순간을 시로 끄집어 낸 것이죠. 적어도 이 한 순간에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나의 자식이 연결고리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의 정이 드러나는 효과를 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제면에서는 상투성을 면하기 어려운데도 개인의 체험을 보편화는 방향에서 발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슷한 정서를 느끼는 사람들이 공감을 충분히 이룰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울컥 치밀어 오르는 그 정서의 격렬함에 견주면 너무나 논리정연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너무 논리화되었다는 느낌이죠. 바로 이 점이 누구에게나 설명하기 좋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 비평에서 말하는 갖가지 논리의 틀로 설명하기에 아주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 확 와 닿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래 황동규의 작품과 비교하면 잘 드러납니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한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 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에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전문.

이 시는 앞의 시와는 형태 면에서부터 다릅니다. 앞의 시는 행을 나누었는데, 이 시는 산문시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형식상의 특징이 시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각 시가 전하고자 하는 정서입니다.

「즐거운 편지」는 가만히 읽어 보면 의미나 표현이 좀 몽롱한 곳이 많습니다. 그리고 생각의 끄트머리를 길게 잡고 늘어져서 문장 전체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앞의 시 「성탄제」와는 그런 점에서 다릅니다. 그리고 직접 전달해야 할 의미가 이미지로 대체되어서 대체된 그 이미지를 해석해내는 데도 상당한 공이 듭니다. 표현이 좀 애매모호해서 의미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눈이 퍼붓는 것과 그것이 그치는 것이 사랑의 행위로 잘 연결되지 않는 단점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시 전체의 이미지를 마음속에서 해독하면 흐릿하던 영상이 한꺼번에 전체의 그림을 가지고 되살아나는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그것도 대단한 감성을 동반하면서 살아납니다. 마치 골목에서 헤매던 사람이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볼 때, 자신이 헤맸던 그 골목의 전체 구조를 한 눈에 파악하면서 그 안에 서렸던 갖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살아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냅니다.

만약에 황동규의 시가 맘에 들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논리성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논리성은 때로 시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시가 전하는 것은 논리가 찾아낼 수 있는 의미가 아니라 사물과 사건이 전해주는 감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자세를 바꾼 사람이 꽃피고 낙엽 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태도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 시는 영원히 미궁일 뿐입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실연당한 사람이 다방에서 듣는 유행가가 가슴을 저미듯이, 사랑의 자세를 바꾼다는 의미를 파악한 사람에게 이 시의 정서는 폭포수처럼 들이닥칩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시는 영원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한계는 시를 가르치는 곳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시가 논리로 설명하기 좋다는 느낌이 올 때는, 반대로 이것이 전하고자 하는 무슨 정서가 있는가 하는 것을 반문하며,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이 경계심이 풀리면 논리와 분석으로 밝힐 수 있는 주제만이 부각됩니다. 그러면 시의 생명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석과 논리가 시 비평의 주된 임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사들은 대부분 그런 논리로 무장을 하고 시를 보고 가르칩니다. 학생들이 써오는 시도 그런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학생들의 감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시 쓰기를 유도하는 빌미가 됨을 알고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의미나 주제가 아니라, 그 주제 주변에 서려있는 느낌입니다. 논리가 아니라 느낌입니다. 시의 본질은 감성입니다. 음악을 듣고 느끼는 그 때의 감정과 똑같습니다. 의미를 전하는 도구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이상한 운명을 시는 타고났습니다. 시를 감상할 때나 시 쓰기를 지도할 때나 이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시 쓰기를 위한 준비

1) 아이는 시인으로 태어난다.

아이들은 타고난 시인입니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쓰라고 하면 언제든지 시를 쓰는 사람이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시인인데, 시인이 아닌 교사가 가르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잘 쓰는 아이들에게 시를 쓰지 못하는 방법을 주입만 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신이 타고난 품성대로 시를 씁니다. 그러니 교사가 해야 할 것은 시 쓰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를 못 쓰게 하는 것을 가르치는 자신의 실수를 막는 것일 뿐입니다.

시는 인류가 만들어낸 예술 양식 중에 가장 간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의 성패는 세상을 보는 눈에 달렸습니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비친 세상이 곧 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서 갖가지 궁금증을 품게 됩니다. 그 궁금증을 품는 눈이 바로 시의 눈이고, 그 궁금증에 대해 스스로 찾은 답을 제시하는 것이 시입니다.

영영사전 
-이명종(회인중 1)

나는 똑똑하다.
그래서 인지 인기가 없다.

는 두껍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나를 어려워한다.

나는 어둡다.
항상 구석진 어두운 자리에 있다.

나는 단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날 싫어한다.

항상 슬픈 나는…
영영사전이다.

덧보태고 뺄 것이 없습니다. 완벽한 시입니다. 세상의 사물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그 답을 스스로 찾았습니다. 이것이 시입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이 헤쳐 갈 세상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인식의 촉수가 세상을 열려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세상은 아이들에게 전부를 열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궁금한 것입니다. 그 궁금증이 이런 답을 스스로 만들어냅니다. 한계가 있지만, 그 한계가 아주 순수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한계를 벗어난 어른들로 하여금 감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서가 때 묻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이 순수한 마음 때문인 것입니다.

교사가 시 쓰는 아이들을 위해 할 일은 그들이 하려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2) 작품을 많이 읽게 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려면, 창작에 참고가 될 만한 작품을 많이 소개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기성 시인의 작품을 소개해주면 좋고, 주변의 또래들이 쓴 작품이면 더 좋습니다.

교사는 좋은 작품을 쓰지는 못해도 그것을 읽을 능력은 있습니다. 비평의 눈으로 계속 공부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좋다고 이름난 시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도 추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시들을 잘 선별해서 수업시간에 간간이 소개해주고 낭송을 시키면 아이들이 시를 보는 안목은 정말 빨리 자랍니다. 그리고 그 안목은 자신이 시를 쓰는데 금방 활용됩니다.

3) 중학교 시기의 특수성과 시 이해의 방향

작품을 쓰게 할 때도 그렇고 작품을 감상할 때도 그렇고 학생들이 처한 조건을 고려하면 좋습니다. 여기서는 중학생을 상대로 하는 것이니 이 시기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시의 이해와 창작에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합니다.

중학교는 대체로 사춘기와 일치합니다. 요즘은 아이들의 성장이 빨라져서 초등학교 고학년인 5, 6학년쯤이면 사춘기에 접어듭니다. 그리고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칩니다. 옛날에는 고등학교 때 왔는데, 요즘은 몇 년 앞당겨졌죠. 그래서 학생 폭력 사안도 고등학교보다는 중학교에서 더 많이 일어납니다.

사춘기란, 말뜻으로 보면, 이성(春)을 생각하는 시기라는 뜻이지만, 이 시기의 본질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질문에 처음으로 눈뜨는 것에 있습니다. 이성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의 한 부분입니다. 부모 밑에서 내가 더 이상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 시기이고,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리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그 나름대로 살아갈 방도를 찾다가 도저히 찾을 수 없으니까 방황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방황과 반발은 모두 이런 심리상황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 또한 이런 범주로 읽게 하고 쓰게 유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코드만 맞으면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그리고 훌륭한 작품을 써냅니다. 우선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드러내게 하고, 세상과 접촉하면서 벌어지는 상처에 대해 생각하게 하면 아이들은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합니다. 그리고 그 관심을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있는 옆 친구들에게 확대하고 나아가 가족, 이웃으로 넓히며, 나중에는 국가와 사회 전반의 관심사로 넓혀가는 것입니다.

교사가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

교사가 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

아이들은 타고난 시인이지만, 자신이 그런 줄을 모릅니다. 자신이 시를 잘 쓰면서도 써놓은 그것이 시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을 정답으로 알게 됩니다. 선생님이 잘 썼다고 하면 잘 쓴 줄로 알고, 못 썼다고 하면 못 쓴 줄로 압니다. 타고난 시인이 스스로 시인임을 아는 것은 자신이 아닌 남의 깨우침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한 마디가 시인을 정말 시인으로 우뚝 세울 수 있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킬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재능을 잘 살려 주려면 몇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성과를 기대하면 안 된다.

아이들이 시를 잘 쓸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시는 잘 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는 어느 한 순간의 마음이 자극을 받아서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내가 잘 쓴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아이들은 진지하지도 않고 실수도 많이 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시를 잘 쓸 것이라고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냥 시키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시를 쓰는 일이 생활 속에서 늘상 벌어지는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학생들에게 시를 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활 속에서 시가 나오는 것임을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시를 써서 아이들이 어떤 성과를 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정말 금물입니다.

더욱이 아이들에게 외부에서 시행하는 대회에 나갔으면 하는 기대를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아이들을 영원히 죽이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글 잘 쓰는 아이들은 대회에 나갈 수 있지만, 그것은 글을 쓰는 생활 속의 한 모습일 뿐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대개 백일장이나 대회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에 부합하는 글이 당선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는 그런 목적성 글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우러나는 갖가지 복잡하고 다양한 심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것이 시입니다. 시가 본래 그런 것인데, 행사성 글쓰기에 동원하고 나면, 그래서 그런 관행이 아이의 몸에 배면 그 학생은 어떤 일에 동원되어야만 글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평생에 그럴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학교에서 그런 일이 생길 뿐이죠. 그렇게 되다간 결국은 졸업과 동시에 시를 버린다는 얘기입니다.

만약에 상을 몇 번 타서 유명세를 얻게 되면 그 학생은 평생 그 따위 시만을 쓰게 됩니다. 거짓투성이로 일관된 사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시 쓰기를 배우는데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교사가 시에서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학생을 죽이고 시를 죽이는 일입니다. 순수하게 쓰기만 시키면 됩니다. 그 밖의 것은 긁어 부스럼입니다.

2) 강요하면 안 된다.

강요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전혀 강요하지 않으면 정말 안 씁니다. 강요하되 강요가 아닌 방법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정말 하기 싫은 것을 시키면 그것은 강요입니다. 그런데 귀찮기는 한데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강요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시를 쓴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입니다. 그래서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한 번 써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는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정말 어거지로 시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3) 잘 썼다 못 썼다는 말은 절대 금지

아이들이 글을 쓸 때, 나는 못쓰겠다고 결심하고 쓰는 학생은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만약에 학생이 써온 글이 교사의 눈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못 썼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음부터는 시를 쓰지 말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반대로 잘 썼다고 말하는 것도 크게 옳지 않습니다. 잘 썼다고 말을 하면 칭찬 받은 아이는 다음번에 그와 같은 방식의 멋을 부립니다. 멋을 부리면 아이들의 시는 죽습니다. 창작에서 칭찬은 독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게 잘 쓴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기준은 주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시를 평소에 소개해주는 것인데, 기성 시인의 작품들보다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기성 시인들은 거의가 쓸데없는 말 재주를 부립니다. 말재주가 동원되지 않으면 쓰지 않으려는 것이 시인들이 생리입니다. 그런 것을 학생들이 배우면 학생들은 영원히 시를 쓰지 못하게 됩니다.

학생들에게 그런 작품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면 안 됩니다. 강조한다고 해도 학생들은 그것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흉내 내다가 졸작을 만든다는 것은, 창작을 조금만 고민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시를 몇 편 쓰게 한 뒤에 그 중에서 가장 좋은 시를 골라주는 것입니다. 이 시가 가장 좋다는 말을 들으면 학생은 그 시를 쓸 때의 상황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자신의 감각을 맞춥니다. 계속해서 좋은 시를 선택해주면 학생의 수준은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합니다.

4) 심심풀이로 쓴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에 때가 처음으로 묻는 것은 욕심을 낼 때입니다. 특히 선생님의 칭찬을 받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칭찬이 반복되고 상까지 타게 되면 욕심이 생깁니다.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 시를 써서 뭘 어쩌겠노라.’라는 생각을 하면 시는 이상해집니다. 그 순간 시는 꽝입니다. 그래서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심심풀이로 써본다는 생각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에 부담이 없고, 마음에 부담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가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잡아냅니다. 이것은 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뭘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마음은 경직되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에서는 상상력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훈계나 넋두리만 나오다 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심풀이 삼아 쓴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렇게 유도해야 합니다.

5) 시 이론을 가르치면 안 된다.

시는 이렇게 저렇게 쓰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가르치면 안 됩니다. 학생들은 이미 시 쓰는 방법을 다 알고 있습니다. 뚜렷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 이렇게 표현하면 선생님들이 좋아하는구나.’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과서에서 많이 봐왔기 때문에 행도 연도 자연스럽게 나눌 줄 압니다. 여기에다 대고 행이 어떻고 연이 어떻고 이미지가 어떻고 설명하면 오히려 더 못 씁니다. 잘 달리는 아이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론은 달리는 말에 족쇄를 채우는 일입니다.

퇴고 도와주기

학생들은 타고난 시인이지만 결코 처음부터 시를 잘 쓰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학생들이 써오는 시는 완벽한 경우도 많지만 고쳐야 할 부분도 많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써온 시를 살펴보면 여기저기 허점을 많이 드러내어 고쳐주고 싶은 충동으로 입이 근질거립니다.

그러나 이런 충동은 자제할수록 좋습니다. 한 동안 쓰는 것을 지켜보다가 전체의 큰 줄기만을 잡아주면 됩니다. 학생들의 작품은 수준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다보면 어떤 때는 잘 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산만하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학생이 잘 쓴 작품을 자각하게 하여 시를 그런 방법으로 계속 쓰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만 주의하면 됩니다.

1) 작품 선택으로 좋은 시를 알려준다.

학생들의 작품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좋은 작품을 알려줄 때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평상시에 작품을 쓰도록 시키고서 나중에 시화전을 한다든지 할 때 그 중에 가장 좋은 작품을 지정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매년 학생들과 시화전을 했습니다. 시화전이 있기 전까지 될수록 자주 학생들에게 시를 쓰게 합니다. 그러다가 시화전을 시작해보면 그때까지 써온 여러 작품 중에서 한 작품을 고르게 됩니다. 노트에 쓰인 시들을 학생과 함께 모두 읽어본 다음에

“선생님 생각에는 이 작품이 제일 좋다.”

라고 하면서 지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학생 자신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그때그때 작품을 썼지만,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인지, 어떤 작품이 좋은 것인지 잘 알지 못하다가 이렇게 한 번 선택을 받고 나면 마음속에 그런 작품이 좋은 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한 번 좋은 작품을 쓴 기억이 있기 때문에 다음에 시를 쓰라고 하면 선택받은 그 시를 쓸 때의 정서로 돌아가서 사물을 보고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 태도가 계속 반복되면 학생 나름대로 시 쓸 때의 마음 상태를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표현의 부분에 대해서 지적한다든가 하면, 시를 쓸 때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이 마음에 남아 한 구절 한 구절 표현할 때마다 마음의 장애로 작용합니다. 많은 작품 가운데서 가장 좋은 작품을 골라주는 것이 가장 좋은 시 창작 교육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은 개인에게도 좋은 방법이지만, 학급 전체에도 해당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이 얼떨결에 시를 써놓고서도 그것이 좋은 시인지 어떤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수업 시간이나 시를 감상할 때에 특별히 잘 된 시를 골라서 소개를 해주면 소개된 학생은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을 보는 학생들은 어떤 작품을 쓸 때에 선생님한테 칭찬받는다는 것을 은연중 깨닫게 됩니다. 몇 번만 그렇게 하면 한 반의 시 쓰기 수준이 갑자기 향상됩니다.

2)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본다

아이들이 가져온 작품을 보면 어딘가 꼭 모자라는 곳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불가피하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아이들의 생각이 그리로 흘러가도록 유도해야지 이거다 저거다 잘라 말하면 아이의 샘솟는 상상력은 그 자리에서 멎어버립니다.

시는 짧지만 그 안에 완결된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형식은 대개 주제와 이미지에서 옵니다. 시가 흘러가는 맥락은 대개 주제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런데 긴 생각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특성상 시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전개해나가다가 처음 생각한 것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흐지부지 끝내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부분을 지적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가 아니라 ‘이 부분은 좀 이상하지 않니?’, ‘어째 좀 덜 끝낸 것 같다.’ 하는 정도의 가벼운 지적이면, 그 학생은 스스로 고민 끝에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문제점을 금방 알아챕니다. 그리고 정말 기발하게 그 부분을 고칩니다. 이렇게 저렇게 고치라고 하면 그 기발함을 놓쳐버립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작품이 그렇습니다.

소망
-장미(내북중 3)

저 깊은
숲 속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이리저리
미처 보지 못했던 곳까지
바라본다.

바라보지 못했던 곳에는
작은 꽃이
열매를 맺는다.

이 학생은 국어 시간에 함께 뒷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제가 시를 써보자고 하는 강요에 못 이겨서 이 시를 썼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대번에 느껴지겠지만, 뭔가 끄트머리에 할 얘기를 하다 만 듯한 느낌이 남습니다. 서둘러 마친 것이죠. 그래서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야, 이건 끝에 뭔가 얘기를 하다가 만 느낌이다. 안 그래?”

그랬더니 책상으로 돌아간 지 채 1분이 안 되어 돌아왔습니다. 물론 끝을 채워서 돌아왔습니다. 채워진 마지막 연은 이렇습니다.

그 열매 속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소망들이 담겨있다.

이 마지막 연까지 채워서 시를 읽으면 상당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완결 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아졌고 내용도 한결 성숙해졌습니다.

이처럼 작품에서는 부분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나 수정보다는 전체의 흐름을 조절해서 이미지가 흘러갈 방향을 미리 정리해보면 되고, 채워야 하거나 불필요한 부분이 없나를 살펴서 그런 큰 부분만 지적을 해주면 학생들은 아주 쉽게 고치고 또 이해합니다. 작품에 대해 퇴고를 도와줄 때는 반드시 숲을 가리켜야지 나무를 가리켜선 안 됩니다.

3) 주제의 시와 이미지의 시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선생님들이 읽는 곳이기에 일단 언급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시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 중에 이미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시각 이미지가 중요합니다. 보통 시를 쓰라고 하면 주제로 씁니다. 그래서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것 가운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식으로 쓰죠. 그런데 어떤 때는 주제를 드러내지 않고 시각 이미지만으로 시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엘리어트가 말한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하는데, 어쩌다보면 학생 중에도 이 기법으로 써오는 수가 있습니다. 순전히 풍경 묘사만으로 시가 이루어진 경우입니다. 이럴 때는 대부분 주제가 안 드러나기 때문에 주제가 드러나도록 직접 말을 하라고 지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은, 위의 「소망」이라는 학생 작품도 여기에 가까운 경우입니다. 이런 시는 떨떠름하고 아쉬워도 그냥 묘사로 그치게 두어야 합니다.

강아지 
-배형준(내북중 2)

얼마 전 태어난
새끼 강아지

9마리의 강아지가
와글와글 북적북적

젖 달라고 우는 소리
깨갱깨갱

제일 귀여운 새끼 강아지
쓰다듬어 주고 만져주는데

내 손가락을 쪽쪽 빤다.
간지러운 가운데 손가락

그러다 내 손가락 깨물면
한 대 때려준다.

9마리의 귀여운 
새끼 강아지.
밥 한 숟가락, 잠 한 바가지
-강혜지(회인중 1)

밥 한 숟가락
“냠냠”
잠이 한 바가지.

밥 두 숟가락
“쩝쩝”
잠이 두 바가지.

밥 한 공기
“꿀꺽”
잠에 묻혀 눈꺼풀이 스르륵.

너무 깔끔하게 묘사되어서 시가 전하고자 하는 상황이 아주 잘 와 닿습니다. 이와 같이 이미지만으로도 시는 훌륭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런 시에서는 정경만 잘 나타나기 때문에 별로 추가할 말이 없지만, 이미지만으로 써오는 시에 주제를 다시 덧보태오라는 주문을 하면 시로서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시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특별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주제를 통해서 일관성을 유지시키고, 중복되는 내용을 하나로 줄이거나 압축시켜주면 됩니다.

이상 세 가지 정도의 큰 줄기만 기억을 하면 학생들에게 크게 부담을 주지 않고도 시를 쓰게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학생들이 직접 쓴 시를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시 쓰기의 실제-체험이 시를 쓴다.

프로인 시인들의 시를 읽다가, 아마추어인 학생들의 시를 읽어보면 묘한 차이를 한 가지 느끼게 됩니다. 시인들의 시는 앞뒤가 빠짐없이 꽉 짜였는데 어딘가 꾸민 듯한 냄새가 느껴지지만, 학생들이 쓴 시는 어딘가 허술한데도 훨씬 더 신선합니다. 이 묘한 차이는 이미지의 신선도에서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즉 프로 시인들의 이미지는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다시 다듬어진 터여서 어느 모로 보아도 빈틈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쓴 시는 방금 자신이 겪고, 보고, 듣고, 느낀 것에서 직접 부딪혀 건진 것이기 때문에 막 꺼낸 생선처럼 감정의 물이 묻어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미지가 좀 서툴러도 신선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이 자신의 체험과 뒤섞여서 나타나지 않으면 이미지는 흐려지거나 동떨어진 느낌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시를 쓰려고 하면 반드시 그들이 끄집어 낼 시의 재료를 경험 속에서 찾도록 해야 합니다. 즉 경험시킨 다음에 시를 쓰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생생한 이미지들을 건져 올립니다. 거기에는 꾸밈이 없어서 이미지가 사물과 완전히 밀착되어 최초의 신선한 언어로 살아납니다. 바로 이런 정황을 자꾸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체험을 시키지 않으면 학생들도 어른들의 시처럼 신선한 느낌이 많이 사라집니다.

물론 학생들도 자신의 주변에서 체험한 것을 토대로 시를 쓰기 때문에 굳이 체험을 따로 시키지 않아도 신선한 이미지를 건져 올리기는 하지만, 체험 없이 시를 쓰게 몇 번만 하면 시 역시 상투화해버립니다. 이것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점입니다. 그래서 시를 쓰게 하도록 하는 상황은 학생들의 체험이 이루어진 직후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를 쓰기 전에는 학생들이 아무리 황당한 조건을 제시해 와도 다 받아들입니다. 컴퓨터를 하자, 축구를 하자, 뒷산에 놀러 가자, 화전을 부쳐 먹자……. 이런 체험들은 시로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1. 뒷산 한 바퀴

3월 개학을 하고 나면 곧 봄이 옵니다. 뒷산에는 꽃들이 많이 피어납니다. 특히 산수유와 진달래가 제일 먼저 와서 아이들의 관심을 끕니다. 그럴 때 화창한 날씨가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뒷산으로 올라가서 한 시간 동안 동네를 한 바퀴 돕니다. 그리고 그다음 시간에는 어김없이 시를 쓰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하루 전에 체험한 그 생생한 느낌을 아주 잘 적어냅니다. 나오는 그대로 시가 됩니다.

진달래

-노승희(내북중 1)

은은한 진달래 향기 따라서

봄이 오나보다.

뒷산 길을 따라가 보니

진달래가 소복소복

아이들이 놀다가

걸쳐놓고 간 솜사탕처럼

곱게 곱게 피어 있다.

진달래 꽃길이 나있는 곳

그 꽃길이 꼭 나를

마중 나와 있는 것 같다.

뒷산은 온통 진달래 꽃 내음과

자신을 뽐내는 꽃들의

축제가 한창이다

—————————-

국어 시간에

-이세호(내북중 2)

오늘

국어시간에 산을 올랐다.

조금 올라가니

새들의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올라가니

꽃들의 향기가 난다.

조금 더 올라가니

너구리도 보낸다.

내북중 뒷산에는

보물산.

언제나

가고 싶은 우리 학교 뒷산

——————————–

진달래 사스

박은범(내북중 2)

산에 사스가 유행한다

진달래만 걸리는 사스

우리는 산에 문병을 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심한 사스 유행

모두들 사스가 무서워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어쩔 수 없이 나온 진달래꽃

사스 걸리기 전에 광놈 민호와 철한테 죽는다

불쌍한 진달래꽃들

—————————

나들이 가던 날

김민지(내북중 3-1)

어미 닭과 그 뒤를 졸졸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우리도 선생님 뒤를 따라

쫑쫑거리며 봄나들이를 간다.

우리가 나들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곤히 자던 잠을 깨고 눈을 비비며

서로서로 먼저 나오려고 발버둥을 친다.

할미꽃은 허리 많이 아픈지 고개를 들을 생각도 않는다.

진달래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줄지어 서서

바람을 따라 산들산들거린다.

진달래가 샘이 났는지,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우리를 막아서서 못 가게 가시를 이용해 마구 찔러댄다.

우리는 ‘아야’ ‘아야’ 하며, 화를 내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샘이 나서가 아니라

관심을 끌기 위해서란 걸…….

의인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비유도 나옵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치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학생들의 시선이 옮아가는 대로 자연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관찰력이 그대로 시로 옮겨온 경우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아이들에게 경험을 시키면 그 즉시 어렵지 않게 만들어내는 시입니다. 그리고 시를 쓸 때 체험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는 학생들이 얼마든지 씁니다. 더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를 씁니다. 그리고 대부분 고만고만한 시를 씁니다. 더 낫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타고난 시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체험을 시키고서 시를 쓰면 시에 대부분 줄거리가 나타납니다. 줄거리를 시라는 짧은 양식 안에 집어넣는 집중력을 배울 수 있어서, 어떤 행위에 대한 시 쓰기는 효과가 아주 좋습니다.

2. 시장 구경

회인면에는 닷새에 한 번 장이 섭니다. 옛날에는 대단했다고 하는데, 요즘은 농촌 인구가 워낙 줄어서 아침나절에 잠시 열리고 점심 무렵에 파장이 됩니다. 이런 풍경도 아이들은 늘 보는 것이지만, 그것을 한 번 체험시키면 작품으로 만들어지곤 합니다. 작품의 수준 여부와는 상관없이 체험이 주는 생생함이 살아납니다.

새끼손가락

-박선미(회인중 1)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

엄지처럼 거대하진 않지만

검지, 중지, 약지처럼

크지는 않지만

우리 장터

있을 거 다 있는

작지만 정이 느껴지는

작은 우리 장터.

새끼손가락같이 작은

시골 장터.

시장 체험 보고서

-강혜지(회인중 3)

따사로운 햇볕, 불어오는 바람.

재잘거리는 참새처럼 곧잘 떠드는 아이들.

나란히 나란히 시장 나들이를 간다.

사람 몇 명 없는 시장, 볼 것 없는 시장.

수업하기 싫은 아이들의 좋은 핑계거리

생선 파는 아저씨, 생선 사려는 아줌마.

옷 파는 아저씨, 옷 사려는 아줌마.

채소 파는 아줌마, 채소 사려는 아저씨.

양말 파는 아저씨, 양말 사는 아줌마.

깎으랴, 올리랴 땀 뻘뻘 흘리는 사람들

사람 몇 명 없는 시장, 볼 것 없는 시장.

아직은 살아 있다, 내 뒤쪽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분다.

이것은 시장에 데리고 갔을 때의 경험을 적은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래도 한 편의 시가 됩니다. 아이들이 시를 잘 썼느냐 못 썼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훈련이 되면 어느 순간 갑자기 좋은 작품이 튀어나옵니다. 그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놀라운 작품이 나옵니다.

엄마

-강혜지(회인중 3)

엄마.

우리 엄마는 키가 나보다 작다.

발도 나보다 작다.

손도 나보다 작아지려고 한다.

엄마.

우리 엄마는 나보다 더 많이 안다.

내가 짜증 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동생 혜미가 화낼 때는 어떻게 풀어줄지도 안다.

밭에 있는 인삼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도 알고

집 옆에 묶여 있던 검둥이가 도로로 뛰쳐나갈 때

붙잡는 법도 안다.

혼자서도 병원 갈 줄도 알고

혼자서도 밥 먹을 줄도 안다.

자기 옷 안 사도 자식 옷 사는 법도 알고

자식 먹이고자 자기 입 덜 줄도 안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미워할 수가 없다.

나보다 작지만

더 큰 엄마.

사람은 살아가면서 ‘울컥’ 하는 순간을 마주칩니다. 그 울컥 치미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진정한 시인은 울컥한 그 순간의 감정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 학생은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시로 써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순간을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세계라는 얘기를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그 순간을 시로 쓸 줄 알게 됩니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학생들이 겪는 모든 일은 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매년 실시하는 소풍이라든가 무슨 행사도 잘만 유도하면 시로 즉각 나타납니다. 그래서 국어 시간에 많은 볼거리와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 학생들이 좋은 시를 쓰도록 하는 자료가 됩니다. 그리고 요구만 하면 얼마든지 학생들은 좋은 작품을 쏟아냅니다.

3. 침뜸

전에 교원연수에 침뜸 과정이 있어서 침뜸을 배운 후로는 몸이 불편하다는 아이들이 있으면 침을 놔주곤 했습니다. 시를 쓰라고 했더니, 귀찮다면서 쓸 게 없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그러면 ‘정 쓸 게 없는 놈들은 침놓는 선생님에 대해라도 써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은 작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침을 놓는 국어 선생님
김민규(회인중 2)

국어 시간이면
재미있게 놀던 친구들이
아프다고 하며
침을 맞는다.
 
한 손에 침을 든 국어 선생님
다른 한 손으로 톡톡 치면서
침을 살로 집어넣는다.

약간 차가운 침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면
차가운 기운이
내 몸을 돌아다닌다.
 
침을 뽑을 때는
아픈 곳이 나아
기분이 좋지만

왜 이렇게 피가 나는지
국어 선생님의 실력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정화타
-이욱재(회인중 2)
 
정화타
침을 놓으신다.
말로는
침은 만병통치약
그럼 사람은 왜 죽나요?
정화타
면허증 없는 불법시술
내 발목
안 낫는 이유
아무 데나 놓는 침
찌릿할 때까지
쑤시는 침
쑤시다 쑤시다
내 다리
벌집 되겠네.
정화타
돌팔이.
침 한 방으로
-유지환(회인중 2)
 
국어선생님의
침 한 방으로
창섭이의 여자친구와 헤어진 고통도 치유되고
 
국어선생님의
침 한 방으로
민규의 어젯밤에 먹다만 빵을 흘린 고통도 치유되고
 
국어선생님의
침 한 방으로
지환이의 소녀 팬이 보내준 편지 읽느라
고생한 고된 피로도 치유되고

치유되지 않는 게 없는
국어선생님의 침
 

침에 대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침에 대해 이렇게 재미있게 시를 쓰는 것은, 자신들이 직접 보고 겪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체험이 있기 때문에 그 체험 부분을 있는 그대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꾸밈없는 상상력이 새로운 말도 잘 만들어내는 것을 볼 수 있고, 우리말이 삶 속에서 아주 잘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민규의 「침을 놓는 국어 선생님」이나 이욱재의 「정화타」는, 선생님의 침술 실력을 의심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그러면서도 익살스러움이 아주 잘 살아있는 경우죠. 꾸밈이 없는 마음이 이렇게 빙그레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듭니다.

한 가지 체험을 놓고서 아이들의 상상력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3인 3색이어서 어느 하나 같은 게 없습니다. 볼수록 소중합니다. 그 소중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바탕은 체험입니다. 그래서 시 쓰기 전에 체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시로 연결시키면 됩니다.

이욱재의 작품과 김민규의 작품을 시인들이 활동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시인이 댓글을 달았는데, 두 작품 중에서 이욱재의 작품에 1점을 더 주고 싶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둘 다 침놓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느낀 것을 다룬 시이기 때문에 주제가 아닌 상상력의 면에서 관찰된 것입니다.

이 관점은 시인으로서는 아주 당연한 것이기도 한데, 학교에서는 이랬다가는 큰일 납니다. 아이들은 이 말 한 마디에 욱재가 민규보다 시를 더 잘 쓰는 학생으로 결정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까요?

김민규의 시는 침을 맞은 느낌을 시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성이 아주 강합니다. 만면에 이욱재의 시는 침을 맞고도 의심하는 자신의 생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내면의 갈등이 일으키는 긴장이 시의 상상력에 탄력을 부여합니다. 바로 이 탄력을 시인들은 직감으로 알아채고는 그 값을 높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탄력은 학생들의 시 쓰기 실력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긴 것입니다. 다시 써보라고 하고 다른 주제를 주면 그 탄력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우연히 생긴 결과를 강조하면 학생은 자신이 무엇을 잘했는지 모르고 나중에는 그런 폼만 잡으려고 하게 됩니다. 이런 폼들이 학생들의 시에서 나타날 때 허영기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허영기로 가득한 시들 정말 많습니다.

오히려 어떤 체험이나 사실을 시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오래 지속될 때 그 지속된 훈련이 밑거름되어 나중에 정말 상상력이 탄력을 지니게 되는 경지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지도할 때도 이런 발전 단계에 맞추어서 해야지 너무 앞서나가면 길을 잘못 이끌게 됩니다.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좀 더 많은 시를 보면 좋겠으나, 연재에 제한이 있는 지면 관계상 더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은 저로서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다른 기회를 기다려봅니다.

시 쓰기 유도하기

1. 시 쓰기를 유도하는 몇 가지 방법

요즘 아이들은 뭘 한다는 걸 싫어합니다. 적어도 귀찮아합니다. 학생들에게 시를 쓰게 하려면 그런 귀찮음을 이기고 달려들 수 있는 미끼를 던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불가피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이런 편법을 써서라도 시를 쓰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교과수업시간

강의식 수업은 졸음을 유도합니다. 자연히 그런 방식에 익숙한 아이들은 지겨움을 달래려고 별짓을 다 합니다. 대개 수업을 하지 않고 자유 시간을 달라거나, 아니면 좀 더 편한 수업을 하기를 원하고, 그것도 아니면 짧은 시간 내에 무언가를 하고 나머지를 자유 시간으로 얻으려는 꾀를 씁니다. 그러면 적당히 모른 척하고 속아줍니다. 예를 들면 시를 쓸 시간을 10분 주고 나머지 시간을 그 발표를 듣는 방식이죠. 그러면 한 학생이 발표하는 동안 다른 학생은 그 발표를 듣거나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짓을 할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면 시 쓰는 시간은 불과 5분이 채 안 걸립니다. 나머지 시간은 모른 척하고 그렇게 때우게 해줍니다.

제가 지금 근무하는 회인중학교 옆에는 오장환 문학관이 있습니다. 담장이 없어 메마른 도랑을 넘어가면 바로 문학관입니다. 볕 좋은 가을에 오장환이 살던 집의 마루에 걸터앉아서 시를 쓰라고 하면 아이들은 시 쓸 생각은 않고 장난만 칩니다. 그냥 둡니다. 시는 5분이면 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장난치게 두어도 다음 시간에 시를 발표시키면 남들이 발표하는 동안에 시 한 편을 뚝딱 써버립니다. 그렇게 벼락치기로 써도 명작이 나오는 갈래가 시입니다.

실제로 국어책에는 시가 꼭 나옵니다. 그 단원을 배우면서 학생들이 읽을 만한 좋은 시를 인터넷에서 보여주든가 아니면 복사해서 나눠주고 읽게 하면 그런 시에 실린 발상법을 금방 배워서 활용합니다. 아이들 생각의 말랑말랑함은 어른들하고는 다릅니다. 그리고 시를 배우는 단원에서는 반드시 학생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래서 뒷산을 한 바퀴 돌고 오면 기분전환도 되고 그런 기분전환이 시를 쓰는 흥취로 연결됩니다.

2) 흥정하기

비슷한 방식의 수업이 오래 진행되다 보면 아이들은 꾀가 납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는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놀자든가, 컴퓨터게임을 하게 해달라든가, 축구를 하자든가 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한테 이런 제안을 할 정도이면 학생과 교사 사이는 아주 밀접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안 된다고 잘라 말하는 것은 그런 얘기를 할 만큼 가깝다고 느끼는 아이들의 심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허락을 하되, 그 다음 시간에 자신이 한 것을 글로 옮긴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쓰기 싫은 글을 써야 하는 줄 알면서도 바로 앞의 꿀떡을 냉큼 물고 맙니다. 그러면 그 다음 시간에 글을 써야 합니다. 약속을 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씁니다. 물론 끝까지 뺀질거리는 놈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거절할 것이 아니라 흥정이라도 해서 아이들이 글을 쓰도록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아이들이 많은 요즘은, 글쓰기를 컴퓨터에서 시키는 것도 한 번쯤 해볼 만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교사가 학생들이 언제든지 들어와서 글을 남길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을 한 군데 확보해놓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제목을 <머털도사의 즐거운 학교>라고 붙였는데, 학년별로 방을 하나씩 만들어서 모든 작품은 이곳에 올리도록 해놓았습니다. 시는 물론, 수필, 독후감, 방학 중 과제까지 기간만 지정하면 이곳에다 글을 올리는 것을 모든 과제를 마감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작업한 모든 것을 카페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졸업한 후에도 이 카페에 들어오면 자신들이 3년 동안 올렸던 글과 친구들의 글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학교별로, 학년별로 방이 나뉘어서 언제나 들어와서 글을 올립니다. 졸업생들도 이따금 들어와서 근황을 남기고 갑니다.

3) 행사 후 소감 쓰기

학교에는 갖가지 행사가 있습니다. 공식행사가 대부분입니다. 소풍, 수학여행, 축제, 아가모 실천운동(충북), 학교폭력 글짓기 같은 것들입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좋아하고 참여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강제 동원되는 행사들입니다. 기분이 좋았던 행사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소감을 정리하게 합니다. 꼭 거창하게 할 것은 없습니다. 간단한 정리를 요구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런 습관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되고, 또 그런 정리 버릇이 들면 글쓰기가 한결 쉬워집니다. 학생들에게 요구하기도 쉽습니다.

다음은 매년 같은 장소로 가는 소풍을 다녀와서 쓴 시입니다. 이 정도면 억지로 쓴 것치고는 괜찮은 수확이라 할 것입니다.

8km
-황미선(내북중 3)

미동산 수목원 등산길
8km.

힘들어
헥헥 거리며 오른
오르막길 2km.

찰칵 찰칵
즐겁게 사진 찍으며 오른
등산길 2km.

이곳저곳
구경하며, 수다 떨며 걸은
산책길 2km.

쏴아 쏴아 빗길을
우산 쓰며 내려온
내리막길 2km.

추억으로 장식할 마지막 길
친구들이 있는 수목원 종착점.

4) 벌칙성 과제

학생들에게 벌칙으로 글을 쓰게 하는 것은 최악입니다. 글쓰기를 독으로 만들어서 아예 등을 돌리게 만드는 일이죠. 반성문 같은 것은, 사람의 감성과 영혼을 한꺼번에 죽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자발성이 약간 들어있는 강제는 글쓰기에 좋은 작용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떠들거나 숙제를 안 해오거나 해서 벌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길 경우, 그런 상황에 처한 자신의 심정을 시로 써오면 벌을 면제해주는 방식입니다. 이럴 때는 학생이 전혀 할 의사가 없는데 시키면 최악입니다. 학생이 어느 정도 이 제안을 받아들일 태도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5) 행사 참여시키기

지역 문화행사에는 대부분 백일장이 있습니다. 그런 백일장에서는 그렇고 그런 뻔한 시들이 상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에서 시를 가르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런 행사가 있구나 하는 것을 일깨워줄 필요는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많은 학생들을 참가시켜서 체험시키는 것도 좋습니다.

회인중학교의 경우 담장을 하나 사이로 오장환문학관이 있는데, 매년 문학제를 하면서 백일장을 엽니다. 그래서 전교생이 다 백일장에 참여합니다. 물론 그럴 때 쓰는 시의 성격이나 요령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 행사가 있으니 참가하여 한 번 써본다는 그런 정도의 설명만 해줍니다. 그래도 상을 받는 학생들이 꽤 나옵니다.

상이 걸린 행사라고 해서 거기에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망칩니다. 특히 그런 것을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를 망가뜨립니다. 결국은 시를 망가뜨리는 일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2. 시 쓰기의 결과물

글쓰기를 싫어하는 학생들은 가장 간단한 시를 쓰는 데도 그것을 귀찮아합니다. 이런 학생들이 반 강요 비슷한 분위기로 시를 쓰면 곧 잊어버립니다. 마치 똥 누는 것처럼 돌아보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런 작업들이 몇 차례 반복되면 그런 행위들이 결과물을 쌓게 되고, 그런 것들을 학생들은 눈여겨보지 않는다고 해도, 교사가 그것을 잘 보관하면 나중에 그럴 듯한 보람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그 보람은, 그것을 귀찮은 것으로만 여겨왔던 학생들에게 좋은 추억거리가 됩니다.

1)시화전

소규모 학교에서 시를 쓰는 가장 좋은 목적은 시화전입니다. 학교에서는 매년 학예발표회나 축제를 하게 되고, 그런 분위기에 맞추어 시화전을 열면 겉으로 보기에 가장 하려한 행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시화전을 행사의 일환으로만 생각하여 추진하면 그것을 추진하는 선생님이나 학생들이 모두 심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것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로 만들지 않으려면 연초부터 학생들에게 기회가 닿을 때마다 시 쓰기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면 그때까지 쓴 시 중에서 선생님이 보기에 가장 좋은 시를 골라서 시화를 그리면 복잡할 것 같은 시화전도 아주 간단히 그리고 재미있게 할 수 있습니다.

내북중학교는 각 학년에 1학급만 있는 작은 학교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아주 편하고 좋았습니다. 내북중학교에서는 축제가 5월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축제가 시작되면 시화전도 함께 시작되어서 상당히 일찍 시 쓰기를 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3월부터 몇 차례 시 쓰기를 합니다.

축제 준비가 시작되면 모든 시화전 준비는 학생들이 하도록 했습니다. 서무실에 부탁해서 커다란 합판을 사다달라고 하고서는, 문짝만한 합판이 도착하면 톱, 망치, 사포, 아세테이트지, 테이프 같은 모든 준비물을 마련해줍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스스로 자신의 시화 크기에 맞게 합판을 톱으로 자르고 사포로 문지르고 시화그림을 붙이고 아세테이트지를 덮어씌우고 해서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시화를 시화전이 끝나고 복도 곳곳에 걸었는데, 몇 달이 지나자 변형이 생기는 것입니다. 습기에 노출되면서 합판이 비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3년째부터는 합판 뒤에 가느다란 나무 테두리가 붙은 패널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문방구나 표구점에서 4,000원이면 구했는데 한 3년 사이에 곱절인 8,000원으로 뛰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예 학교 예산에 편성하여 매년 구입해다 씁니다. 패널로 하면 변형도 가지 않고 나머지 공정은 학생들이 스스로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좋은 추억이 됩니다.

학생들은 미술도 배우고 기술도 배우기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잘합니다. 처음에는 실수도 하지만 시화를 그릴 때도 자신이 한 번 그렸다가 옆 친구의 것이 좋으면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다시 그립니다. 이 곁눈질은 학년 간에도 이루어져 신입생들은 멋모르고 얼렁뚱땅 해냈다가 선배들의 작품이 워낙 깔끔한 것을 보고는 다시 해내는 일이 해마다 반복됩니다. 한두 해만 지나면 시화전의 모습은 시내의 표구점에서 만들어주는 것 못지않게 좋아집니다.

이 시화전 체험은 나중에 학생들이 상급학교 진학한 후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 고등학교에 가서도 어렵지 않게 학교 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실제로 시내 고등학교에서 시화전 경험을 한 학생들 손들어보라고 하면 한 반에 두엇 정도인데, 그것도 대부분 시를 표구점에 맡겨서 표구점에서 예쁜 글씨로 써서 만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직접 쓰고 그리고 붙이고, 심지어 톱질까지 해서 시화전을 한 학생은, 자신이 할 때는 몰라도, 지나고 나면 정말 대단한 추억임을 기억하고는 중학교 때의 추억거리로 떠올립니다.

2) 작품집

시화전을 열면 꼭 작품집을 만듭니다. 인원이 40-50명 정도인 학교이기 때문에 전교생이 한 작품씩 내도록 하여 시화전에 제출된 작품을 책 형식으로 묶는 것입니다.

B5용지로 프린트 하여, 그것을 B4용지에 앞뒤로 붙여서 복사한 다음, 반을 접어서 박음쇠로 한 번 박고 표지를 풀로 붙이는 것입니다. 학교 복사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돈이 들 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품이 듭니다만 그것도 학생들 몇을 불러다 시키거나 교무보조에게 부탁하면 어렵지 않게 끝납니다.

3) 문집

전 학년이 3개 학급이기 때문에 저는 모든 학년의 국어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매년 학년말에 마무리 작업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3학년에게는 졸업논문을, 2학년에게는 소설쓰기를, 1학년에게는 학급문집을 만들게 합니다. 여기다가 매년 하는 시화전까지 하여 작품집을 만듭니다. 그러면 1년에 4권의 책이 생깁니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엮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다보면, 교장선생님이 매년 이런 제안을 해옵니다. 즉 돈을 지원해줄 테니 이런 글들을 모아서 학교 이름을 출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제안을 매년 거절했습니다.

이 창작 지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어선생님들이라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창작을 가리키는 것은, 창작을 해본 사람이나 창작을 해보려고 한 사람이 아니고는 가르치기 참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가리키면 창작의 본질과는 어긋나는 것을 강조하게 되어 자칫하면 학생의 창작능력을 싹부터 문질러버리는 엉뚱한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걱정이 되어 ‘제도화’하자는 교장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하곤 합니다.

저는 시를 창작하는 전문가이고 또 창작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어서 제가 아는 그 만큼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다가 때가 되면 다른 학교로 전근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글쓰는 행위를 학교의 예산에 책정하여 시행하면 그것은 내가 다른 곳으로 떠난 뒤에도 제도로 남아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강요할 것이고, 그 후에 벌어지는 상황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도만 남아서 학생들에게 억지 일을 시키게 됩니다.

물론 후임으로 오는 분이 저와 같은 성향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앞서 분석한 것처럼 교사가 창작에 직접 관여하는 경우는 정말 많지 않습니다. 안 좋은 결과가 예상됩니다. 그래서 모든 행위를 저 개인의 일에서 학교 전체의 일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교장 선생님의 제안을 거절하곤 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창의성을 발휘하여 무언가 그럴 듯한 것이 이루어지면, 그것을 꼭 드러내서 학교의 업적으로 내세우려는 것이 학교를 관리하고 지도하는 책임자들의 생리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임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학교의 특별한 자랑거리로 부각되면 그 행위의 본 취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서 학생들을 들볶는 가장 성가신 물건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교육현장에서 평생토록 보아온 것입니다. 아침자습이 그러하고 방과 후 활동이 그러합니다. 왜곡된 어른들의 시각에 어느 하나 제대로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그런 제안을 거절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올해(2008) 회인중학교에서 처음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예외를 허용한 것은, 그 제안을 한 교장 선생님이 위에서 말한 그런 우려를 고려할 줄 아는 분이라는 것과, 전에 근무한 내북중학교에서 제가 떠난 뒤 지금까지도 똑같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북중학교를 떠나면서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후임으로 오는 선생님이 받을 마음의 부담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후임이신 반성남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무리를 주지 않고 같은 작업을 해서 학교 측의 지원으로 매년 깔끔하게 제본된 문집을 만들어서 내북중학교의 전통으로 확립시켰습니다.

이런 전통은 교사가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학생들 사이에서 저절로 형성된 것이어서 굳이 막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즉 제가 부임하던 첫해인 2000년에 학생들이 졸업논문을 썼는데 두 차례 그 작업을 반복하자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3학년이 되면 졸업논문을 써야 한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어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 1학년 때는 문집 만들고, 2학년 때는 소설을 쓰고, 3학년이 되면 졸업논문 쓰는 거야.’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매년 이런 작업을 알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교장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소규모 학교가 갖는 문제 때문입니다. 졸업생이 매년 15명 내외이다 보니 여태까지 졸업앨범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졸업을 할 때 전체 사진을 찍어서 표지를 만들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허전하기 짝이 없지요. 그런데 그 동안 썼던 학생들의 글을 모아서 졸업문집을 만들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즉 문집의 앞쪽에 칼라로 학생사진과 전체 사진, 그리고 학생활동과 관련된 추억거리 사진을 몇 장 넣으면 그것은 굳이 앨범을 만들지 않아도 학생들에게는 앨범 이상의 효과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올해는 졸업논문집과 시 작품집, 그리고 소설집까지 모아서 사진과 함께 묶고는 “꿈을 키우는 회인골 문집”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올해 처음 해보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서 앞으로는 매년 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설령 제가 떠나고 후임자 분이 저와 똑같이 할 수 없다고 해도 1년간 학생들이 쓴 글을 모아서 묶으면 되기 때문에 앨범 문제까지 해결되는 이 방법은 좋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거, 상투화한 연례행사로 전락하지 않고 학생들이 즐거이 참여하는 일이 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시의 3원소

1. 시의 3원소

앞서 여러 차례 얘기했듯이 아이들은 타고난 시인입니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시 쓸 상황만 만들어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잘 씁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것을 바라보는 교사가 시 창작의 원리를 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써오는 시에 대해서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는 기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그 기준에 대해 정리하려고 합니다.

혹시 시중에 시의 창작 원리를 잘 설명한 책이 있을까 하여 몇 년 전에 도서관을 뒤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 쓰기를 안내한다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의 대부분이 시 창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시 이론을 소개하는 데 급급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학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시 쓰는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시 창작 안내서로 버젓이 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정말 무엇을 알고자 하는지, 안내서를 쓰는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아예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시인들이 인터넷에서도 수많은 시 창작 강의를 하는데, 전부 똑같습니다. 이론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 창작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가 알기로, 빛깔은 무한히 많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색깔들은 모두 빨강, 파랑, 노랑 3가지 빛이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조화입니다. 결국 이 삼원색이 수많은 색들을 만들어내는 기본이 되는 것이죠.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 이론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용어가 있고 방법이 있다고 설명하지만, 제가 한 20여 년 시를 쓰면서 보니, 시 쓰는 사람이 사용하는 방법은 단 3가지뿐입니다. 빗대기[1], 그리기[2], 말하기[3]가 그것입니다.

빗대기[1]는 비유의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의인법을 비롯하여 은유, 직유, 상징까지 다 포함됩니다. 이것은 시에서 아주 많이 쓰이는 기법입니다.

발가락
        유제성(내북중 3)
다섯 명의
가족이 살고 있는 양말 속
발가락 중에
제일 큰 아빠 발가락
두 번째로 큰 엄마 발가락
그리고 아빠를 닮은 세 번째 발가락
또 네 번째 발가락은 엄마를 닮았네
그럼 다섯 번째 발가락은
누굴 닮았을까?
그건 바로 아빠 발가락과 엄마 발가락을
모두 닮은 잘 생긴 막둥이 발가락이다.

발가락과 가족의 동일성을 찾아서 비유로 만든 시입니다. 아주 신선하게 잘 연결되었죠. 다음으로, 그리기[2]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묘사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이미지를 사용하는 시작법이죠.

가을풍경
       신민영 (회인중1)
덜덜덜덜
요란한 경운기가
노래를 하며 간다.
그 노래에 맞춰
허수아비와 참새가
짝을 이루어 춤을 춘다.
하늘하늘
쌀, 보리 댄서들
노을 조명.
한편의 뮤직 뱅크
가을 풍경 한 장.

특별한 말이나 주제를 부각시키지 않고 풍경 묘사로 그쳤습니다. 그런데도 아주 풍경이 잘 살아나서 읽는 이로 하여금 묘한 감동을 일으킵니다. 잃어버린 순수한 마음이 풍경과 마주쳐서 이미지로 잘 살아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미지로만 시를 쓰는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직접 말하는 방법인 말하기[3]도 있습니다.

시간
      김강수(회인중2)

시간 난 이 녀석이 좋다.
이 녀석이 지나가면
내 상처는 없어지고  새살이 돋는다.
그래서 난 시간이 좋다.

시간 난 이 녀석이 싫다.
이 녀석은 우사인 볼트보다 빨라서
나를 점점 늙게 만든다.
그래서 난 시간이 싫다.

시간 난 시간이 좋다.
오늘은 불행이 있어도 희망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난 시간이 좋다.
싫은 것보단  좋은 것이 많은 시간
난 이 녀석이 좋다!

특별한 장치에 기대지 않고 시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로 나타냈습니다. 이렇게 해도 생각의 신선함 때문에 시가 되었습니다. 시에서는 이 3가지 방법이 서로 섞이면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3가지 방법이 섞인 다른 다양한 작품도 있습니다.

침이 들어간다
            이소혜(회인중1)
아~ 왜 이리 속이 매스껍지?
속이 아파도
속이 쓰려도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은
바로 교무실.
교무실에 들어가면
눈 덮인 언덕처럼
하얀 머리를 가지고 계신
우리들의 국어 선생님
“자~ 어디보자!”
하시며 뾰족한 침을
내 눈앞에 보이시는
침꾼 우리 선생님
아얏!
침이 들어간다.
뾰족한 침이 들어간다.
난 잠이 든다.

이 작품은 자신의 침 맞은 체험을 말한 것입니다. [3]이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말하기[3]의 방법과 그리기[2]의 방법이 뒤섞인 시입니다. 따라서 [3+2]형의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는 아주 복잡한 것 같지만 위의 세 가지 방법이 변형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창작의 관점에서 시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리만 안다면 시를 지도할 때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시 창작의 원리는 모두 3가지입니다. 아니, 4가지겠군요. 변형과 종합이 있으니까요.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1. 빗대기 - 동일시의 시학[1]
  2. 그리기 - 이미지의 시학[2]
  3. 말하기 - 이야기의 시학[3]
  4. 뒤섞기 - 변형과 종합의 시학

뒤섞기의 경우는 아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경우의 수만 해도 [1+2], [1+3], [2+1], [2+3], [3+1], [3+2], [1+2+3], [2+1+3], [3+2+1]…… 무한대죠.

빛깔에는 3원색이 있듯이, 시에는 3원소가 있습니다. 시는 그 3원소로 이루어졌고, 그 3원소를 알아보는 순간, 시의 정체가 눈앞에 또렷이 드러납니다.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원리를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시 한 귀퉁이에다가 [1]이라거나 [3+1], 아니면 더 복잡하게 [1+3+2] 하는 식으로 슬그머니 표시를 해두면 그 시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몇 차례 연습을 해보면 시를 읽는 순간 그 시의 창작 원리가 한 눈에 쏙 들어옵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내 스스로 시를 쓸 수도 있습니다. 그 복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갑니다.

꼬리말 우화

지루한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저것 그럴 듯한 말들을 생각하다가 다 집어치우고 우화 몇 가지로 대신합니다.

우화 1 : 물놀이

2001년 내북중학교. 7월초면 기말고사도 끝나 딱히 할 일도 없습니다. 날씨는 이제 여름의 절정으로 치닫느라 헉헉거릴 만큼 더워지죠. 졸린 5교시 3학년 수업을 하는데 느닷없이 한 녀석이 소리칩니다.

“선생님, 우리 물놀이 가요.”

그 전 해 2학기에는 학교 앞 개울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저의 이런 행태를 아는 녀석이 내지른 말입니다. 제가 안 된다고 잘라버렸으면 끝났을 텐데, 잠시 망설이는 틈을 보이자 다른 녀석들도 덩달아서 들떴습니다. 그래서 6교시 영어 선생님에게 시간을 달라고 하고 2시간을 내쳐 놀 생각으로 교실을 나섰습니다. 20분 가면 어른 키도 삼키는 깊은 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문쯤 나가고 있으니까 2학년 교실에서도 웅성거리더니 잠시 후에 우리 행렬의 꼬리에 따라 붙었습니다. 그리곤 곧 1학년도 합류했습니다. 3학년 국어, 2학년 영어, 1학년 사회 시간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입니다. 연세 지긋한 체육 선생님이 우리의 움직임을 보고 불안했는지 교장실에 올라가서 보고라도 하라고 해서 제가 올라가 구두허락을 맡았습니다.

그리곤 신나게 물놀이 했습니다. 처음엔 저희들끼리 놀더니 물가에서 쭈뼛거리는 선생님들을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서는 옷까지 다 버려놓았습니다. 처녀 선생님의 비명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잠시 후 KBS 지역 방송 차가 나타나서는 몇 장면을 찍습니다.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니 여름철 물놀이 보도 자료를 찍으러 왔구나. 신나게 놀다가 갈 때가 되어 아까 방송차가 카메라를 들이댔던 곳에 가 보았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수영금지”

그리고 이 촬영 화면은 약간 흐릿하게 처리되어 그날 저녁 7시와 9시 저녁 뉴스에 물놀이 위험 경고 자료로 방영되었습니다.

다음날 학교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약간 흐릿하게 처리되어 화면에 나오기는 했지만, 그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면 그곳이 어느 곳인가는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대가 센 저나 영어 선생님한테는 뭐라고 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함께 갔던 애꿎은 처녀 선생님만 심한 질책을 듣고 내려왔습니다. 다행히 그냥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래도 매년 7월이면 우리는 그곳으로 가서 물놀이 했습니다. 그 이듬해 교장선생님이 바뀌었거든요. 그리고 그때 혼났던 처녀 선생님은 지금은 도를 바꿔 경기도에서 근무한다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잘 계시지요? 홍석영 선생님!

우화 2 : 학교 울타리 밖 외출 금지

수업 행위를 바라보는 눈이 다르면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생깁니다. 내북중학교. 봄이면 국어시간에 뒷산으로 나들이 갑니다. 진달래, 산수유가 피었는데 한창 사춘기로 접어든 아이들의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이렇게라도 풀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풀어진 마음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축구를 하자, 컴퓨터를 하게 해 달라 별별 요구를 다합니다.

어슬렁거리며 뒷산을 한 바퀴 돌고 동네로 돌아 나오면 농사짓는 동네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냥 아저씨도 있고 때로는 아이의 엄마나 아빠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사를 하고 학교로 돌아옵니다. 그리곤 다음 날 시를 쓰죠.

이것이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장, 교감입니다. 거슬리지 않아야 하는데 거슬립니다. 대개는 우리의 빈둥거리는 행동거지를 곁눈질한, 우리가 오가며 마주친 그 학부형들로부터 항의 전화를 한 통 받고난 뒤입니다.

내내 문제가 없다가 교감까지 발령 난 뒤에 일이 생겼습니다. 원래 3개 학급만 있는 소규모 학교에는 교감이 교장을 대행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북중학교에는 교감이 교장을 대행했습니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1997년에 터지자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외환위기로 우리나라 모든 경제구조와 행정체제가 너무 비대해서 문제라고 지적이 연일 방송에서 터져 나왔고 그것을 효율성을 갖춘 방향으로 정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런데 교육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한 방향으로 이 논리가 작용했습니다. 사회구조의 재편성 과정에서 소외된 곳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었고, 소규모 학교가 소외되고 있다는 식으로 논리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러더니 시골의 소규모 학교에는 교장이 없다는 소리가 커지고, 결국 이 소리는 교감이 교장 대행으로 있는 학교에 교장을 발령 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실제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러니까 교감 밖에 없던 작은 학교에 교장까지 온 것입니다. 심지어 2개 학년씩 합반으로 운영하는 어떤 초등학교에서는 선생님 셋에, 그 위로 교장과 교감이 얹히게 된 것입니다.

외환위기의 문제가 학교에는 이런 황당무계한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교감밖에 없는 학교에 교장까지 오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요? 감시감독의 강화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행정 문제라면 교감 대행체제로도 거뜬합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이 몇 십 년 동안 진행돼온 이 체제가 어려운 경제난국의 극복 차원에서 더 많은 관료를 학교에 배치하게 된 것입니다. 경제위기 극복의 방안으로 이게 맞기는 맞는 건가요? 저는 그쪽으로는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는 지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이상함은 예상대로 선생님들을 옥죄는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갈 때는 결재를 맡고 나가라는 말을 합니다. 봄날의 국어시간에는 냉이 캐기, 뒷산 꽃구경하기, 앞개울에서 물고기잡기 행사가 있습니다. 3개 학년이 돌아가면서 하니, 3월 한 달 내내 학교는 시끌시끌합니다. 이게 뜳었던 게지요. 시골학교에서 이게 결재를 받고 해야 할 일인가요?

우화 3 : 국어시간에 축구를 해?

할일도 없이 컴퓨터만 하던 교감 선생님이 어느 날 큰 사건을 하나 발견합니다. 학생 하나가 창문 밖으로 떨어뜨린 공책을 주워서 들춰보다가 눈이 번쩍 띄는 내용을 확인한 것입니다. 국어시간에 축구를 해서 재미있었다는, 공책 반쪽짜리 수필입니다. 교감은 그것을 잘 복사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학생에게 공책을 돌려주었죠.

3월 초, 교과서 정산 때문에 담당자하고 통화하느라고 수업이 4분 가량 늦어졌습니다. 허겁지겁 운동장으로 가보니 애들을 모아놓고 그 교감이 얼굴이 벌게진 채로 아이들을 혼냅니다. 수업종이 쳤는데도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농구대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던 겝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농구하기로 약속해서 내가 하라고 했다고 하고는 아이들을 넘겨받았습니다. 혼나던 아이들을 저한테 넘기면서 째려보더군요. 수업을 했습니다. 편을 갈라서 농구를 했죠.

수업을 마치고 와서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분개를 하며 자신의 교직을 걸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큰소리치더군요. 제깟 게 교직을 걸거나 말거나 그건 그쪽 사정이고, 교과 담임이 조금 늦는 동안 지난 시간에 약속됐던 것을 애들이 하고 있는데, 불러다가 호통 치는 건 뭐고, 담당 교사가 상황을 설명했으면 그러냐고 하면 될 것이지, 애들 보는 앞에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째려보는 건 또 뭐냐는 그런 항의에 이 교감은 오히려 길길이 날뛰는 것이었습니다.

교사가 그렇게 대들면 교감이나 된 사람이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자고 하여 앞뒤 상황 파악을 하고 잘잘못을 가리면 굳이 소리 높일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일을 키우는 건 그릇이 안 되는 자가 그 그릇이 놓여선 안 될 자리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린 교무부장은, 오히려 교감 편을 들지 않고 교사를 두둔했다고 해서 미움을 받았습니다. 미운털이 박힌 그 교무부장이 저에게 넌지시 축구 시간 수필 복사 사실을 알려주어서 저도 비로소 그런 줄 알았습니다. 일이 커질 때를 대비한 증거자료 수집이겠죠? 국어시간에 축구를 하면 안 된다고 믿는 자들이 국어를 정말 글자 안에 가두어놓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연한 학교 현실입니다.

우화 4 : 장날 체험

2006년에 옆 면소재지의 회인중학교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옮겨도 저에게는 똑같은 생활이었습니다. 봄이 오면 아이들 데리고 산을 한 바퀴 돌고, 냉이 캐고……. 그런데 회인은 내북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동네에 오일장이 서는 것입니다. 너무 정겨운 모습입니다.

장날의 내력은 오래 되었겠지만, 지금은 농촌에 사람이 없어 아침나절에 반짝 열리고 맙니다. 오전 7시 경에 열려서 정오쯤이면 파장이 됩니다. 좀 붐비는 철이라야 버섯이 나오는 초여름과 고추가 나오는 가을철 몇 차례뿐입니다. 그래서 1교시에 국어가 든 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장 구경을 갔습니다. 장 구경을 다녀와도 시간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습니다. 구경거리도 그만큼 적고 학교도 동네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눈꼴이 사나웠던 모양입니다. 교무부장을 통해서 그런 일이 있으면 구두로라도 허락을 받고 나갔으면 한다는 말이 들어왔습니다. 거리로 치면 100m 가는 것을 허락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장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가 봐야 크게 새로울 것도 없고 아이들은 그 동네에 사는 애들이 많아서 그게 큰 자극을 주는 체험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안 되어 군 교육청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재래시장 위축으로 시장 상인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학생들에게 체험학습이나 견학을 권장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의 생각이 갑자기 바뀐 교장이 아침 교무회의 시간에 그렇게 떠들고 있었습니다. 허긴, 교무부장을 통해서 간접 전달한 것이었으니, 표면상 교무회의 석상에서 한 말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화 5 : 학교

저의 교직생활 20년은, 우리에게 학교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행위였습니다. 지금도 묻습니다. 대답 없는 학교를 향해. 학교야, 학교야, 넌 도대체 뭐니?

필자 소개

정진명 선생님은 1960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고, 1987년 계간 <문학과비평>에 시 추천을 받았습니다. 2005년에는 빈터 홈페이지(www.poemcafe.com)에 <중고생을 위한 시창작 강의> 연재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정신의 뼈󰡕, 󰡔용설󰡕, 󰡔완전한 사랑󰡕, 󰡔노자의 지팡이󰡕 등이 있으며, 저서로 󰡔우리 활 이야기󰡕, 󰡔한국의 활쏘기󰡕, 󰡔이야기 활 풍속사󰡕, 󰡔우리 침뜸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참고)

중고생을 위한 시창작 강의(http://cafe.daum.net/dosanym/YVNu/1);『이다』, 충북국어교사모임, 2004